인도네시아에서 전합니다 81 (20161016)
모든 진리의 원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으로 문안를 올립니다. 모두다 강녕하신지요? 국내의 다사다난함을 뉴스롤 통해 실시간으로 접하며 치열하게 신앙의 분투를 해나가실 여러분을 생각하니, 절로 위하여 기도하고 싶어 무릎이 끓어집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계속하여 살아가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하나, 죽어야 산다
지난 주에 압디엘 신학교에서 구원론의 ‘회개’를 가르치며 칼빈목사님이 말한 Mortification of the flesh와 Quickening of the Spirit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두가지는 언뜻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종종 다른의미를 가진 두 단어들의 같은의미를 가진 한 단어표현으로 보여지지만, 원서에서의 칼빈목사님의 의도는 정확히 분리되어 있더군요.
회개의 결과물로 드러날 ‘영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욕을 금해야, 다른 말로, 죽여야 하기때문에, 육욕을 죽이는 작업이 회개의 전반부로 반드시 이뤄졌어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쉬운말로 하면 “더러운 육이 죽지않으면, 거룩한 영이 살아나는 다음단계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기까지는 어렵지 않았지만, 마음에 확 와닿을 정도로 확실하고 구체적인 인지는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9월 26일에 조안이가 병원에 입원하면서 겪은 10일간의 열대 풍토병인 댕기열과 티푸스와의 투쟁을 지켜보며, 이상의 이론적 이해의 구체적인 실례를 발견했던 겁니다. 댕기열의 발생시키는 병원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한 40도의 고열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티푸스를 발생시키는 병원체가 사라지지 않는한 이로 인해 생기는 고열이 댕기열 병원체를 살아남게 해주더군요. 초기에 신속한 발견과 조치로 내부기관의 출혈과 같은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잘된 초기대응때문에 4일에서 5일이면 충분했을 치료기간이 길어져 10일간이나 병원체와 조안이의 긴 싸움이 이어져 왔던 것이었습니다.
댕기열과 티푸스의 병원체들이 죽으니 사랑스러운 제 딸 조안이가 살아나더군요. ‘더러운 병원체가 죽지 않으면, 건강한 몸이 살아나는 다음단계로 나갈수가 없다’는 사실을 통해 진리의 가르침을 세삼 깊이 알고 경험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선교편지를 빌어 조안이의 병회복을 위해 열심으로 기도해주신 모든분들께 정말 고개숙여 깊이깊이 감사드립니다. 조안이의 엄청나게 떨어진 체력으로 인해, 학교(홈스쿨)에도 부탁하여 한달의 유예를 이미 받은 상태이고 지금은 기운을 회복하려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하여 피상적인 이해만을 하고도 다 아는 척하였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둘, 반드시 갈린다
오늘도 제자인 헨디 전도사님이 사역하는 교회에 “순회설교”–미국 부흥기의 목회자들의 순회로 생각지 마십시오. 정직히 목회지가 없는 선교사의 특수한 환경이 허락하는 잦은 외부설교 청탁정도로 이해하시길–를 다녀왔습니다. 설교내용을 반복해 기술할 의도는 없습니다.^^ 해당 본문이었던 마태복음 24장에 밭에 함께 일하던 두사람과 맷돌을 함께 갈던 두여인은 분명히 서로를 상당기간 충분히 아는 사이(그러니 함께 일함)일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그들중 한명만 데려가고 다른 한명은 남겨지는 상황 자체가 정말이지 충격일 겁니다.
이 충격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공감이 가능하다면, 그 공감을 가지고 주님이 하시려는 말씀을 들어봅시다.
먼저 우리의 이땅에서의 일이 끝나는 때가 언제인지를 알수가 없다는 것(현학적인 종말론으로 계산하려 들지말고)과 반드시 누군가는 구원받고 다른 누군가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세상의 모든인류가 구원받아야만 한다 말하지말고), 아마 이 두가지일 겁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지난 10월 3일의 사건때문인데, 제가 가르쳐본적도 있고 제딸 조안이와는 친분도 있고 동갑인 제본의 가족들 중 2명의 갑작스런 죽음을 목격해서입니다(“화려한 저택에서도 산사태라니”라는 자극적인 신문기사 제목이 야속하더군요). 우기인지라 거의 매일 비가오는 지라 당시에도 급한 폭우로 인해 산사태가 발생하여, 18살의 제시카와 9살의 제슨이 흙더미에 묻혀버린 야속한 사건이었습니다. 방에 있다가 거실로 나간 아빠와 엄마는 살고 반대로 거실에 있다가 방에 바로 들어간 애들은 간발의 차로 죽게되었던 이 일로 인해서, 어른인 저도 적잖이 놀랐는데, 친구이고 친분이있는 조안이의 충격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라기는, 잠시라도, 슬픔에 잠긴 이 가정에 세상의 말과 지혜로운 위로가, 줄수 없는 하늘아버지로 부터의 위로가 있기를 기도해주시기를 부탁드려봅니다.
주의 오심이 이와 같을찐데, 더디오시는 현실을 보며, 앞서 나가 생각하길, 보아하니 안오실 것이라고, 안오실거라고, 그렇게 확신하여, 주를 위해 함께 일하며 살아가는 신앙의 동료들에게 주께 명령받으대로 나누고 줘야할 것을 주기보다, 매질을 하듯 다른 이들 위해 군림하려하고, 결국에는 오직 자신의 배만을 배불리게하기 위해서만 살아간다면, 정말 정말 기대치 않은 때에 주님께서 오셔서 우릴 ‘이 몹쓸 악한 종’이라 하시지 않겠는가…. 생각해봤습니다.
기도: 지나온 우리의 인생에서 가치없게 보내었던 시간들을 기억나게하시고, 그로 인해 남은 찰나와 같은 우리의 인생을 최상의 가치이신 주님만으로 채울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셋, 어떻게 인생을 마무리 하려는가
이제 제가 나이가 더많이 들어가나 봅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부고를 접하는 횟수가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최근에 들어 더 빈번하게 장례식장을 다녀오고 있어 정말 더 많이 죽음과 인생의 마무리에 대하여 더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기를 가졌더랬습니다 (빈번한 장례식장 방문이 장례식장 방문에 대한 느낌을 무뎌지게하기 보다는 되려 민감하게하고 있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전의 선교편지에 언급한 이지역의 걸출한 주의 종 구르나또 목사님을 기억하시는지요. 이분의 장례식장에 다녀간 무슬림들과 무슬림지도자들, 그리고 힌두교도들과 힌두구루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분의 소천을 배웅하러 다녀간 사람들을 보며 평소의 인생이 어떠했는지를 다시 확인했던 적이 있었지요. 바로 이분의 가장 가까운 친구, 너무 가까와서 수년간 적대하기까지 한적이 있었던 GIA 이사알마시(꼬란에 있는 선지자로서의 예수님을 지칭하는 명칭) 교단의 총회장인 사무엘 목사님이 계신데, 이분이 갑자기 9월8일에 소천하셨습니다. 소천일의 2주전에 제가 그분이 시무하시는 자카르타의 라자왈리 교회에 설교를 다녀왔기 때문에 당신의 건강한 모습을 선명히 기억하는 저로서는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다만 특이한 점은 평상시와 달리 그때 너무 만은 사적이고 비밀이었던 얘기들을 모두 이틀의 기간동안 나눠주셔서 좋기는 하였지만 놀란 맘으로 집에 돌아왔었습니다.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게 줄여 말씀드리면, 이분의 인생의 족적이 어떠했는지를 이분의 장례식을 통해 알게되었습니다. 교인 200명에 교역자가 11명, 그것도 다른 교회에서 사역자로서 실패하여 갈 곳이 없는 이사 알마시 교단내의 젊은 사역자들을 일부러 불러 사역자로 세워 일하게했고 (성도의 입장에서 무리한 그리고 무심해보이는 결정이라 하겠지만), 그렇게해서 이런 특수한 목회가치관을 통해 훈련받고 성장하여 다른 교회로 정식부임해 나간 사역자들만 16명이나 되더군요. 이들 모두를 장례식장에서 정말 만났으니 과장된 수치일리 만무하죠.
교인이 200명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무엘 목사님은 PGI-이곳을 통해 많은 한국선교사님들이 비자의 도움을 받고있습니다. 이분을 통해 도움을 받은 한국선교사들은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입니다– 라고 하는 ‘인도네시아 개신교 총회’ (한국으로 치면 한기총에 해당)의 고문으로 사역도 하셨습니다. 기재할 칸이 모자랄 정도의 대단한 사역들을 인도네시아의 교회를 위해 하시느라 자신의 교회내부보다는 외부의 사역을 많이하셨음에도, 이런 사역들에 대하여 자신들이 소외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정말 없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제자 강도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강도사를 통해 사무엘 목사님의 성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전해들었습니다. 그제야 성도들의 이상의 반응이 이해가 되더군요. 전 이런 인생의 마무리를 제게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소원해봅니다.
지난학기 홈스쿨 마지막 수업에 조안이의 영어선생님이신 미세스 슈먹 선생님이 마지막 영상 수업에선 출석했던 모든 학생들을 앞에 불러 모아 세우고 녹화되고 있는 비디오를 향해, 듣고있는 시청하는 학생들을 부르며, 마지막 인사를 기쁘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3개월 뒤에 이 선생님은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화면상의 자막이 나옵니다.ㅠㅠ
이미 돌아가셨던 것을 7학년때에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다시 한번 그 사실을 확인할 때에 밀려오는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워 조안이는 넋놓아 울었고, 그 조안이를 보며 저와 조안엄마도 한참을 울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많은 좋은사람들이 죽었다는 걸 말하려는게 아닙니다. 한 훌륭한 인생이 가진 엄청난 파급력을 말하고 싶은 겁니다. 살아서의 가르침은 말할 것도 없고 죽어서도 그 죽음의 교훈이 계속하여 살아남아 전해지는 이 것이 바로 소금과 빛의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와 제 아내는 저희 자신들의 그릇을 잘압니다. 그래서, 그릇이 허락하는 선에서 그 그릇을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저 성실히 있는 자리에서 살아가려는 겁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성심을 다해 신자로 살다가 죽는 것이 정말 아름다운 복받은 인생 아니겠습니까? 저희도 주님 있게하신 이자리에서 신자로 잘 살다가 잘 죽겠습니다.
기도: 예수님 닮고 싶다는 말과 달리 예수님 같은 나그네 인생되기 싫어 안정만을 찾으려 했던, 그래서 수시로 세상과 타협을 하려 하였던 물욕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넷, 정직해지자
이상의 일련의 경험들을 통해 마음을 가난케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저희 자신에 대한 정직한 대면을 하게 합니다.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해야만 하겠습니다. 우리가 출석하는 교회에 다녀가는 특별세미나의 강사나 파트로만 사역하는 이들의 사역에는 그렇게 새롭고 감사표현하면서, 성섬성의로 열심을 다해 본교회를 섬기는 담임교역자와 협력사역자들에 대해서는 감사함이 없다면…문제겠지요. 해외에서 선교하는 사람은 더 신경을 써야하고 국내에서 목회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덜 신경을 쓰려한다면…문제겠지요. 해외선교사의 삶 그렇게 특별하지않습니다 (자신의 사역이 특별하다고 광고하는 거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저 자리만을 달리하여 언어와 문화가 다른지역에 신자로 사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말은 이러한 해석도 가능하겠네요. “한국교회의 목회자의 폐단이 해외인들 없을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서로가 앞다퉈 센터를 세우려고 합니다. 이미 세워진 교회들에 대해서 돌아보기도 전에. 서로가 앞다퉈 세미나를 엽니다. 이미 가르쳐야할 기독교의 기본진리에 대해서 알려주려 노력하기도 전에. 서로가 앞다퉈 선교팀들을 받으려 합니다. 이미 연계된 교회들에 대한 유대와 관심을 끌어내기전에. 제발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학생들이 물어보네요. 팀만받는게 선교인가요. 그렇게 하면 얼마나 받을수 있냐고요.
저는 이곳에서 화를 잘내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예배시간이든지 수업시간이든지 집중하지 않는 이들을 보면 지적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언어가 편하지 않던 때부터 했던 인도네시아어 이뤄지는 모든 사역에서 어색한 설교와 강의와 기도는 예외없이 웃음거리가 되기 때문에, 정착 초기에 이런 일을 수차례하게 되면 이런 실수들에 대하여 비웃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에 참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결국에 폭발을 하는것이죠. 그리고 이때의 동기는 항상 이렇습니다. “내가 이런 사람들을 위해 여기 살다니…”라고 말입니다. 이게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제 그릇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러한 저의 부족함에 대한 인정을 공식적으로 사람들앞에서 하니(설교나 강의의 초반부에 제가 외국인임을 그리고 약간의 실수들이 불가피함을 고백하고 도움을 청합니다), 그때부터 마음이 더 자유로워져서인지 언어에 대한 부담이 사라지고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이렇게 매일 아침에는 일반중고등학교에서 오후에는 신학교에서 저녁에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수많은 대화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한계를 제가 느낀다고 한다면, 비지니스 선교 혹은 사회복지 기관들을 통하여 선교를 한다는 분들은 기독교의 용어와 교회내의 일상용어조차도 익힐 기회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복음을, 그 깊은 진리의 복음을 다른 언어로 전할 수 있겠느냐하는 겁니다. 순회설교, 좋습니다. 현지분들이 어느정도의 이해를 하실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신학강의, 좋습니다. 대학수준의 목회후보생들이 어느정도의 이해를 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사역협력과 지도, 좋습니다. 얼마만큼의 전문적인 선교전략을 목회지도를 해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건 저한데 하는 말입니다. 제 한계를 잊지 않고 겸손하기위해서 말입니다.
혹여 이글을 보고 계시는 선교사후보생이 있다면 기억해주십시오. 영어가 필수일까요? 그렇다면 현지어는 더 필수겠지요? 자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현지어는 더 가르쳐야겠지요? 이 지극히 상식적인 일들에 정직하게 답해보시고 선교지에 간다고 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이상의 맥락에서 한국교회에 부탁하고 싶습니다
무슬림을 언급해야만 반응을 하는 피상적인 선교지에 대한 이해에서 벗어나시기를 강권하고만 싶습니다. 무슬림도 힌두교도도 유교도도 다들 복음을 들어야할 대상임에도 유독 무슬림에 대한 언급에만 반응하고 움직이는 건 거의 무조건 반사와 같은 현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선교사들중에 기독교 마을에 살아도 무슬림 무슬림 하는 사람이 생기는 겁니다.
대통령궁 앞에서, 자신들의 지역에 이미 합법적으로 세워진 새 교회당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수개월을 그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그렇게 할수 있는 인도네시아의 종교의 자유에 대하여 한번 더 생각을 해보아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여기서 서쪽으로 2시간 거리에 위치한 뻐깔롱안 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선교단체의 자료를 통해서도 강경한 무슬림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지요. 그런데 이 도시의 가장 중심부에 가보면, 중앙 로타리 둘레로 큰 모스크와 바로 그 옆에 교회가 그리고 바로 그옆에 성당이 각각 함께 서있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GKI 교단의 교회입니다. 이미 세미니와 학교홍보를 위해 다녀오기도 하였고, 제자인 페르난도도 그곳에서 1년간 사역을 하였기 때문에 잘 압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단체의 정보보다 정확한 실제의 종교현황입니다.
물론, 지난 7월5일 수카르타라 불리우는 솔로(제가 사는 곳에서 두시간거리) 지역에서 IS의 자살폭탄테러가 알카에다와 연관된 사건임이 드러났으니 위험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곳을 사는 선교사들만 위험한게 아니고, 여기사는 사람들도 동일하게 무슬림임에도 불구하고 위험하다는 사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살아야 합니다. 신자로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그 자리에서 잘 살아야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위해 살고있다고 인정 받을때까지 잘 살아야합니다.
기도: 우리의 속을 누구보다 정확히 보고 아시는 하나님, 우리개인의 이익을 위해 의도된 전략을 파쇄하여 주시고, 오직 주의 복음을 듣지 못했고 들었으나 바로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쓰임받는 도구되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다섯, 감사하자
위에서 처럼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선교사에게도 주신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선교사의 신분으로 누리는 특수한 은혜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데: 먼저, (인도네시아니까) 환율의 차이가 있어서 오는 한국으로부터의 재정으로 더많은 재화의 가치를 누립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라면 충분치않을 재정이 여기는 충분합니다 (과하게 충분하다는 말씀은 못드리겠습니다. 제가 입국한 9년전에 비해 물가의 인상이 해마다 15% 올라왔기 때문에, 피부로 느끼는 물가지수는 한국의 1000원을 여기서는 2000원 정도의 가치로 쓴다고 보시면 될것 같습니다. 다만, 공산품과 수입품에 대해서는 한국과 같거나 비싸다고 보시면 맞습니다). 둘, 이런 재정의 유리함으로 최소의 생활비외에 다른 비용을 기쁘게 현지교회의 사역자들을 돕는데 쓸수 있습니다( 섬기는 지역의 성적인 문란함을 해결하기를 소망하여 전문상담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한 제자와, 자신이 섬기는 지역에 위치한 교육기관–최종목적은 기독교교육–에 기관장이 되기위한 조건으로 대학원을 가야하는 제자의 대학원비용들을 도울수 있다는 사실에 하나님께 정말 무한히 무한히 감사드리며 살고 있습니다). 잠깐, 여기서 오해가 없으시길. 현지분들의 도움의 요청에 대하여 확실한 기준을 가지고 재정을 행사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실패하여 헌금을 날려버린 경우도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1200불이었고요).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마음을 다하여 보내어주시는 헌금이 있기에 가능함을 잘 압니다. 그래서 정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마음의 감사가 너무도 확연하기 때문에, 자녀들의 학비로만 낭비하지 않으려하고, 노후를 위해 돈을 때어놓아 준비를 하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본국으로 방문조차도 제가 직면한 재정의 형편을 살펴 계획을 하고 있기도하고요. 좀더 정직히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새벽에 걸려올 전화때문입니다. 일과시간이 아닌새벽에 걸려오는 전화는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공포의 전화입니다. 왜냐하면 혹여라고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경우에 급히 다녀올수 있기 위해선 손대서는 안될 재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왠만하면 본국에 가지않는 것이었고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 맘이 편합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모두의 교만한 마음을 쳐서 꺽어서 낮아지게 해주시고 그 낮은 모습안에서 예수님이 영광받으시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여섯, 이렇게 살지요.
조셉이는 이제 현지학교 유치원생입니다. 현지어를 읽고 쓰는데에 문제가 없어지면 그때서야 홈스쿨을 시켜볼 생각입니다. 조셉이는 매일 5시에 일어나 학교갈 준비를 하고 6시반에 학교의 수업을 시작해 9시반에 끝납니다. 유일한 한국인이라는 특혜는 입학후 2주만에 없어졌고 인도네시아 아이로 잘 자라고 있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은 조조이고 조조의 엄마는 브링인 교회의 성도이신지라 제게 너무 깍듯해서 송구할 지경입니다. 이분의 신앙배경이 무슬림이신데 지금은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열심히 살고 계십니다. 이 신앙의 결정때문에 고향에는 못가게 되셨지만 그래도 하나님께 감사하시다 하시는 분이지요.
조안이와 조이의 일상의 대부분은 홈스쿨링입니다. 조안이의 스페인어는 날로 일취월장하고 있고, 조이의 인도네시아식 영어는 이제 고쳐져서 실력이 많이 늘었습니다. 무서운 엄마의 강요(?)로 매일 성경과 책을 세가지의 언어로 소리내어 읽어야하는 고충을 겪고 있지만 그래도 잘 따라오는 자녀들이 감사하기만 합니다. 브링인교회에서 하는 주중 성경학교에서 상을 받을 정도면 인도네시아어는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한국어는 좀더 신경을 써야할 것 같습니다.
저와 조안엄마는 꾸준하게 성실하게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 게으르지 않으려 합니다. 최근에도 압디엘신학교의 몇몇 여학생들이 귀신들리는 일이 생겼는데 사감인 사모님의 대응때문에 마음이 어려웠었습니다. 이 사모님의 대처법은 방마다 기도해서 만든 성수를 뿌리고 칼라 염색한 학생들에게 귀신이 붙어있으니 다신 검은색으로 염색하라는 것이었고 이때 상담을 청했던 학생이 말하길 자기가 3년전에 회심한 사람으로 이전에 무슬림이었다고 그 때 하던 축사과 소리질러 방언으로 귀신쫓는걸 여기서 진리의 터인 신학교에서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사감 사모님의 심기를 어렵히지않는 선에 개인적인 상담만으로 조언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며, 이런 일이 생기지않기를 바라며 더 열심히 진리만을 가르쳐야겠다 생각하였습니다.
현장에서 한마을에서 뿌리를 내려 살아가는 현지 사역자의 고충을 생각해보셨습니까? 교육 선교라는 이름으로 외국선교사들이 공부방을 만들어 무료로 방과후 공부를 시켜주면서 무슬림 애들을 도왔다 말하지만, 정작 그 아이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있는 주의 종들이 바로 이 무슬림 아이들의 회심과 신앙지도 까지도 고민하고 책임질 목자라는 사실,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럼 현지목회자의 고민은 뭘까요? 예로, 사역자 본인 교회의 한 성도의 어머니가 임종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부탁을 받아 기도를 해주기위해 갔습니다. 기도를 받고 평안해하는 딸과 달리 다른 식구들을 다른 영으로 기도했다고 죽이려는 듯 달려들었답니다. 자리를 피해 나왔지만 임종을 앞둔 당사자가 구스띠(자와어: 하나님)로 기도하는 것도 못하게하고 아워(알라)로만 기도하라고 욱박을 질렀답니다. 구스띠와 아워가 같은 God의 개념이기 때문에 임종을 앞둔 할머니가 무슬림으로 임종하셨다고 하지만, 실제로 구스띠는 자바인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을 칭하는 명칭이고, 하여 하나님의 믿고 돌아가셨다고 믿어야한다고 믿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엔 무엇이 맞다고 해야할까요? (답을 여기 오시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실생활의 현장에 들어가는 것 정작 현지사역자입니다. 우리 쿨하게 인정하였으면 합니다. 그러니 잘살아야죠.
선교에서의 성공은 무엇일까요? 이 성공을 구분하는 기준은 대체 무엇일까요? 세워진 건물인가요, 단체인가요, 보고거리들인가요? 아님, 주어진 임무에 대한 성실도인가요? 고전 4:12절은 분명히 직접적이고 보여지는 것으로서 아니라, 선교의 성공평가의 기준을 신실함–믿고, 믿다가 넘어지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또 믿는 것–으로 못박아 말하는데, 정작 우리시대의 교회와 성도의 기대와 선교사의 관심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냐 묻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일은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성실히 복음을 전하고 삶으로 복음을 살아내는 것이라 믿습니다. 이것이 제가 알고, 믿고, 실천하는 선교입니다.
기도: 이 작은 저희들을 사용하여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얼마나 절대로 꼭 꼭 필요한 분이신지를 알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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