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19 나를 믿는
자는 성령의 세례를 받으리라
요7:37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은 초막절 중간쯤에 12제자와 함께 예루살렘에 도착하셔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초막절 마지막 날에 성전에서 목이 터지라 외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누구든지 인생의 나그네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거든 나를 믿어 의미를 찾아라.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고 인생이
바뀔 것이다.
새로운 삶의 소망으로 힘이 날 것이다. 희망과 활력이 생길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초막절 명절을 지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십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언제 어떻게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은 믿는 자의 믿음으로 성령(세례)을 받게 하십니다.
요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요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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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는 성령을 받게 되고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성령 충만을 경험하게 된다고 증거하십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일부 교회에서는 성령 세례는 성령을 이미 받은 자가 2차적으로 사역을 위하여 다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고 방언의 은사가 동반된다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방언은사를 받으면 성령세례를 받는 것으로 성령세례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오해를 하게 된 이유는 최초의 성령세례를 받았던
120명의 성도에게 오순절날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다는
점을 근거로 방언의 은사가 성령세례의 증거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종들은 주의 진리를 살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자들로부터 진리와 성도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성령세례는 성령이 죄를 깨닫게 하고 죄 사함과 구원을
받으려는 의지를 작동시킴으로 회개와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예수님이 집행자로서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사역을 가리킵니다.
성령이 내주하시면 성령의 열매를 맺으시고, 성령께서 자신을 나타내셔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눠주십니다.
성령세례와 성령의 은사는 차원이 다릅니다.
성령의 은사 중 초자연 은사의 계속성의 논쟁은 차지하고서라도
우선 방언의 은사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진리를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순절 성령 세례의 모습은 단회적으로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세례의 모습은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한 가운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육안으로 보였고 각 사람 위에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임하여 있었습니다.
120명의 성도는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행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행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행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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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
세례를 받으리라(행1:5)”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이 예수님의
승천 후 10일 지난 오순절날 이루어 진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120명의 성도는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행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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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 오순절 날에 나타났던 “다른 방언”은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다른 외국언어”이였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성령세례의 표적으로 “다른 방언”이
나타나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함으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예수님의 외침을 “방언을 말하는 자는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비 진리를 진리로 왜곡하여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믿어 자유 해야 할
상황에서 속박을 당하고 속박을 받아야 할 상황에서는 자유(방종)함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오늘 날 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성령을 받았는데도 성령 받은 사실을 모르고 성령을 받지
못했는데도 성령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여 성도들이 실족합니다.
고전 14장에 나타난 방언의 은사의 설명과 오순절날 성도가
말한 “다른 방언”은 일치가 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설명하는 은사 방언은 방언을 말하는 자가
자신의 영으로 자신의 비밀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없습니다.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고전14: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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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은 방언을 하는 자의 영이 하나님께 (자신의)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는 자신의 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은사로 해석합니다.
오순절날 120명의 성도가 방언을 한 것은 자신들의 비밀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비밀)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날 외국 각처에서 온 유대인들이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오순절에 있었던 방언은 알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방언의
은사가 아니라 오히려 예언의 은사가 나타난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성경적입니다.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된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방언 은사를 받아야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라는
주장은 이단입니다.
믿음으로 성령세례를 받아야 된다는 진리가 방언으로 성령세례를
받아야 된다는 거짓진리로 바꾸어 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는 구원과 관련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방언의 유익은 말하지만 반드시 방언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고전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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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의 은사를 받으면 영적인 거인으로 취급하는 교회의
문화는 시정되어야 합니다.
일만 마디 방언으로 새벽기도마다 다른 사람의 기도를 방해하는
것보다 성경을 묵상하고 깨달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권면하는 것이 더 성숙한 성도가 취할 신앙 태도입니다.
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고전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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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세례의 집행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믿는 자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문자 그대로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을 받고 충만하여져서
흘러 넘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미혹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성령을
받지 못합니다.
2.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성령세례를 받습니다.
요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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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으로부터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으로
거듭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완전 부패입니다.
완전 부패한 사람은 성령님이 거듭나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
선한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성이나 믿을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찾을 수도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해야만 자신의 죄를 깨닫고 지옥의
형벌에 두려움을 느끼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기로 선택된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셔서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사역이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대적했던 완악했던 마음이 양처럼
변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관한
하늘 일에 대하여 아무리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을
임의로 부는 바람의 작용 원리를 차용하여 땅의 일로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니고데모가 이해가 안되어서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며 질문합니다.
요3: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요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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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이 말씀의 의미는 어느 누구도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심이 없으면 하늘 일(복음)은 고사하고 아무리 인간적인 지혜와 경험으로 합리적인 설득으로 땅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쉽게 변증을 해도 하늘 일(복음)을 믿게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에 대한 인간의 이해의
절대적 한계성을 지적함과 동시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이 필수적이다라고 강조를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불신자의 영혼을 터치하고 설득하여 거듭나게 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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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여 새로운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갖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성령의 사역으로 거듭나게 되어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할 때, 그 믿음이 분명할 때,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실 때,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면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거듭난 자의 마음을 성전으로 삼고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하늘 일)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의 복음에는 이미 성취된 예수님의
비하(육신을 입으시고 율법에 예속되심, 십자가의 죽으심)과 승귀(부활, 승천)의 두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초막절 마지막 날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은 복음이 아직 미완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요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나를 믿는 자”는 “복음을 믿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의 사역과 부활하심과 승천의
사역이 이루어져야만 복음이 완성이 되는 것이고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복음의 영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승천 후에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행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행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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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받는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과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와 성령의 임재와 성령을 받음과 성령의 부어주심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성령세례 전에 성령의 거듭남이
있고 성령세례 후엔 성령충만이 있을 뿐입니다.
성령 세례는 믿는 자에게 첫 번째 일어나는 사역이고 성령충만은
성령세례 후 또는 성령세례와 동시에 나타나는 성령의 충만한 지배하심입니다.
적용:
성령세례의 가장 대표적인 표적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고 방언은 성령충만과 성령세례의
확신을 준다는 주장은 비 성경적 진리입니다.
사역을 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2차적 축복인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미혹되어서는 안됩니다.
성령은 거듭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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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믿는 자는 성령세례를 받습니다.
1. 예수님은 믿는 자의 믿음으로 성령(세례)을 받게 하십니다.
2.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성령세례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