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27 예수님의 침 뱉으심과 두 번의 안수(막8:22-26)

2014-07-27 예수님의
침 뱉으심과 두 번의 안수


8: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8: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8:24 우러러 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8: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8: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벳새다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나타냈던 곳입니다.

당시 벳새다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을 믿고 영생을 얻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 처럼  벳새다 사람들도 자신의 성공과 존경을 꿈꾸며 예수님을 자신의 욕망을 이루어주는 발판으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득이 떠나야만
했던 곳입니다
(6:14-15).

예수님이 다시 그 욕망의 마을, 벳새다로 돌아 오셔서 소경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벳새다 소경의 치유하시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3가지의 의문점을 살펴봄으로서 본문이 주시는 교훈과 우리의
적용점을 살펴보겠습니다
.

 

1. 첫번째 의문은 예수님께서 소경을 치료하시면서 왜 소경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으며 치료 후에도 마을에 못 들어가게 하셨는가?”라는 의문입니다.






8: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8: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소경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이유는 소경이 고침받는 표적을 통하여 벳새다
사람들이 오병이어의 표적을 경험하던 때와 같은 잘못된 동기를 갖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

예수님이 나타내시는 표적은 표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표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실재와 권능을 체험하여 자신의 죄를 각성하고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

 

정상적이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종이라면 일반적으로 진리를 사랑하기보다 표적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죄성을 헤아려 성도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떠나지 않도록 자신의 은사를 제한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

사단의 능력으로 표적을 행하는 거짓 선지자와 사단의 일꾼들이
자기보다 더 큰 권능과 표적을 행하면 영적 분별력이 없는 성도들은 다 미혹되어 그들의 탐심을 채우는 이익의 재료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

고후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11: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성도들도 사단의 역사를 따라 나타나는 병 고침과 귀신
쫓음과 권능을 하나님의 역사로 잘못 알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신령한 주의 종으로 존경하며 그들의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는
안됩니다
.

하나님이 표적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증거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2. 두번째 의문은 왜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셨는가?
라는 의문입니다.






8: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한
죄의 권능에 대하여 모욕과 수치를 가하심으로 승리를
선포하시는 상징적인 행위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

예수님은 이전에 청각장애와 언어장애를 동시에 갖고 있는
장애인을 고치실 때도 침을 사용하셔서 저주의 결과인 장애를 침을 뱉아 저주하심으로 장애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셨습니다(막7:33)
.


얼굴에 침을 뱉으라는 명령이 성경에서 딱 한군데 있습니다.

계대 결혼의 의무를 가진 형제가 의무를 피하고자 하면
결혼을 거절당한 미망인이 공개적으로 모욕와 수치를 가하는 징벌의 상징으로 얼굴에 침을 뱉고 신을 벗기라는 명령입니다
.

25:9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

 

침을 뱉으시는 예수님의 행위는 죄의 결과로 나타난 장애를 회복하는 상징으로서 죄의
권능인 장애에게 침으로 모욕과 수치를 주심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던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했던 장애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시는 행위인 것입니다
.

죄의 권능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3. 세번째 의문은 예수님은 왜 두번이나 안수를 하셨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8:24 우러러 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8: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첫번째 안수를 통하여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시력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각 장애인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을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간다고 표현합니다
.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나무 같은 것들과 동일한 피조물로
보고 있습니다
.

육적인 눈은 열렸지만 사람들에 대한 우애나 존경이나 사랑의
감정이 없는 죄의 저주의 눈에 불과합니다
.

두번째 안수를 통하여 만물을 밝히 볼 수 있는 영안이 회복되었습니다.

생물학적인 눈의 치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영안의 치료)
더 중요한 것입니다
.

예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 옛사람의 정욕으로 세상의
썩어질 것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인 믿음위에 덕과 지식
,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을 공급해야 합니다(벧후1:4-8).

벳새다의 장님의 육적인 눈이 회복된 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육적인 눈이 회복되어 자신의 정욕을 불러 일으키는데 사용되어
실족케 한다면 도리어 회복되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

오히려 실족케 하는 눈을 빼어 내버려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는 것을 방지해야 합니다
.

천하를 가지고도 영생을 가지지 못한다면 눈이 백개 있어도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

신의 성품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소경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벧후1: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벧후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벧후1: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1: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벧후1: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적용: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우리의 믿음 위에 도덕적인 삶과
진리와 절제
, 인내, 경건,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죄의 유혹이 올때마다 죄의 권능에 침을 뱉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우리의 영안이 계속 열려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결론:

1. 맹목적으로 표적을 추종해서는
안됩니다
.

2. 죄에 대하여 혐오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

3. 영안이 열린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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